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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90' 2016. 5. 15. 23:33

- 안일한 연애보다는, 짝사랑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 정화의 개념인걸까? 무력해진 내가 타자를 위해 내 자신을 잃어버리고, 다시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 과정 말이다. 


- 어찌보면 나르시시즘에서 탈출해 자기애로 변모하기 위해, 짝사랑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 정희진의 말처럼 밀당은 아예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병철의 책을 읽으니 다른 의미로서 필요한 것 같다. 설렘을 위해서라던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극대화된 사랑을 위해서랄까. 

 첫째, 이를테면 카톡이 없으면 우리의 연애는 더 강렬해질 것이다. 둘째, 에로티시즘은 '위반'과 '금기'를 필요로 한다. 셋째, 타자에게 빠지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이를 극대화하는 단계.

그런데 이게 밀당과는 뭐가 다를까? 사유의 깊이의 차이일까? 아무래도 나 자신이 아니라 정말 상대를 생각해서 하는 것이 다른걸까.




벤야민, 니체, 롤랑바르트, 프로이트, 한병철, 


한병철 (+알랭바디우) vs. 벨훅스



에로스의 힘을 동반하지 못하는 로고스는 무기력하다. 단순히 계산하는 사고 활동에는 아토피아의 부정성이 없다. 그저 긍정적인 것에 대한 노동이다.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의 유혹이 없다면, 사유는 늘 같은 것을 재생산하는 단순한 노동으로 위축되고 말 것이다.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적 사고는 아토포스적 타자의 저항을 전혀 알지 못한다. 에로스 없는 사고는 단순히 반복하고 덧붙여갈 따름이다. 또한 에로스 없는 사랑, 에로스의 정신적 동력을 얻지 못하는 사랑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 관능"으로 전락한다. 관능과 노동은 동일한 질서에 속한다. 여기에는 정신과 욕망이 빠져있다.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7장 이론의 종말에서 알아서 발췌했다. 그러니까 연애든 짝사랑이든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