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Daily/16_관통적문제의식

우리는 전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90' 2016. 12. 17. 17:07

우리는 전부 다르다.


이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일상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기까지는 수십년 깨져도 힘들다.

일본에서 파시즘화가 되던 1938년 국민총동원법 이후, 산업보국회(노조 해산, 전쟁협력 체제 구축) 설립이 된다. 이후 1940년에는 정당도 해산된다. 그리고 '대정익찬회'가 된다. 즉 국수주의자부터 좌파까지 똑같이 한 길로 가는 파시즘적인 것이다. 배급제가 되고, 모여서 국민체조도 똑같이 한다. 한국에서도 가끔 신문에서 '익찬체제'라고 하는데, 그것이 일본의 '대정익찬회'에서 나온 말이다.

어떻게 정치와 삶의 길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우리는 하나라는 말이 참 이상하다. 전부 다 다른데 말이다.

일상을 살아갈 때에도, 각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아둥바둥하고 있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한 쪽만 만나면 그쪽으로 쏠리니까. 대중적인 감을 찾기 위해서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각각 들으며 생각해보고 내가 결국 판단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물며, 이러한 누군가 다치는 상황에서는 어떨까. 한쪽 말만 들으며 한쪽을 비난함에 있어서, '평화의 논리'를 가져오는 것은 위험하다. 평화도 개개인마다 다르다.


이런 관점은 가다머(H-G.Gadamer)나 리쾨르(P. Ricoeur)의 해석이론과도 통한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은 어떤 사물을 파악할 때 자기 나름의 인식의 틀을 통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은 늘 해석된 지식일 수밖에 없다. 인식된 것은 인식하는 사람 내지 인식 지평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체계와 관련해 완전한 절대주의, 순수한 객관주의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이 인간의 언어는 하나의 관점에서 부분적으로만 실재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진술된 진리는 언제나 제한적이고 비절대적이라 보았던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사회적인 공동 규칙에 따라 언어활동(랑그)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도 개인들의 발화행위(빠롤)는 다르다는 소쉬르의 분석도 비슷하다. 개인의 발화행위와 타자에게 전달된 의미도 동일하지 않다. 게다가 각종 발화는 랑그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랑그 역시 역사적 요인들이나 사회적 힘들, 각종 제도들의 관계에 따른 산물이라는 점에서 가변적이다. 발화행위는 애당초 의도했던 만큼 전달되지 않는다.

하버마스가 공론의 장에서 합의를 중시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합의는 제한된 인식이나 이해들이 파편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공통의 영역을 확보해 가는 과정이자, 대화를 시작할 때 전제되었던 선행적 공통지점이 확인되는 사건이다. 물론 합의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버마스도 여론이 집결되는 '공론의 장'은 대화, 토론, 합의를 통해 형성된다고 강조한다. 억압을 일시적으로 분출하는 폭력적 혁명보다 여러 의견들이 오가는 생활세계의 의사소통 과정이 민주주의의 든든한 기반을 만들어준다고 주장한다.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지속적 합의를 통해 생활 세계에서 공감의 영역을 확보해가는 과정이 가능하며 또 요청된다는 것이다.

공감적 공존은 평화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감 자체를 이 글의 주제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학문이든 학문은 공감이라는 내적 능력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힘들어 하는 이들에 대한 측은지심 같은 것이 연구자의 유의미한 추진력이 되지만, 측은지심이나 긍휼만으로는 설득력 있는 연구가 나오지 않는다. 공감 없는 연구는 그저 소음뿐일 수 있지만, 공감력과 함께 연구자 자신도 비평화적 상황에 처해 있음을 주관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상황에서 다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부르디외의 ‘참여적 객관화’라는 말은 이것을 잘 말해 준다.

가령 평화연구자라면 스스로를 폭력적 상황 속에 참여시키면서 동시에 그 폭력적 상황을 객관화시켜 더 많은 이들로 하여금 폭력적 상황에 눈뜨게 해야 한다. 연구자 스스로 폭력적 상황에 참여한다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는 폭력을 줄이도록 시위나 데모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른바 악이라는 것도 어디선가 발생하는 아픔을 직·간접적 관계자들이 외면하면서 구체화된다. “오늘날 악은 누군가의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말없는 윤리적 시선을 외면하는 눈길과 무감각 속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종교철학자 힉(J. Hick)도 악의 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악이라는 문제에 관해 무언가 쓴다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의 믿음에 심각한 도전이 되는 일들에 대해 수동적인 침묵을 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 나는 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도움이 되지도 않는 … 불가지론의 쉼터에서 쉬기보다는 차라리 말을 많이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악의 문제에 대해 수동적인 침묵을 택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차라리 말을 많이 하는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말 속에 ‘참여적 객관화’의 자세가 묻어난다.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학문상의 공감적 태도이기도 하다. 침묵보다는 참여가 학문의 진정성 혹은 실천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참여하되, 연구자의 일방적 개입의 자세가 아니라, 자신을 제한하면서 연구의 대상과 주체의 긴밀한 상관성을 전제할 때, 학문적 성찰의 진정성이 확보된다는 말이다. 참여한다고 해서 타자를 자신 안에 흡수시켜 버리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는 데서 공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