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창피할지도 모르겠다. 첫사랑이라는 기준을 사귄 사람 이상으로 넓게 잡자면 내 첫사랑은 티비에 나오는 유명인, 그것도 전설적인 술안주감이었던 아이돌 출신 문희준이다.
내 방어부터 하자면 나도 열여섯 전에는 아이돌그룹들은 볼품다고 깔보고 최신가요는 저급하다고 깔보고 평론으로 검증된 음악들을 찾아듣던 편협한 허세꾼이었다. 좋아하는 유명인은 백석 같은 시인이나 양조위같은 깊은 눈빛의 배우였다. 근데 어떤 계기로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물론이지 좋아하기 이전부터 이 사람이 얼마나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는 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으로 뜨거울 때 인터넷만 접속하면 문희준과 오이와 욕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고 옹호글이 있으면 부모욕하는 리플부터 쏟아지는 것들을 보고 경악했었다. 중학교 점심시간이 되면 학급의 남자애가 오인용 비디오를 틀어놓고 욕을하며 웃었고 나는 그 때 내가 만약 저 사람의 팬이 되면 힘들겠다,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하늘의 뜻인지 무엇인지 어떤 계기로 그 사람의 팬이 되었는데 그후 몇년이 지나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이 사람의 이름이 나오면 냉소부터 보냈다.
그래서 나는 강해져야했다. 그리고 모두가 떠나도 나만큼은 끝까지 남아 이 사람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랑을 주는 것은 세상 최고로 행복하다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억울하게 매를 맞으면 맞을수록, 그걸 지켜보는 사람의 사랑은 믿을 수 없을만큼 강해지고 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편협하게 사람을 욕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많이 울었고 많은 분노를 느끼곤 했지만 그만큼 많이 깨달은 것들이 많았고 성숙해졌던 것 같다.
옆에 현실의 누군가가 다가와도 관심이 없었다. 그 사람이 너무나 특별해고 그 사람만이 빛나서 그 사람밖에 보이질 않았다. 난 편지를 쓰고 보내기 창피해서 불태워버렸다. 이소라의 바람이분다, 피터팬컴플렉스의 너는 나에게, 넬의 마음을 잃다, 이오공감의 한사람을 위한 마음, 등등의 감성어린 노래 전주만 들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3월 14일 군대에 있던 그의 생일 밤이 되면 놀이터에 나가서 그네를 타며 애잔한 감성에 젖었다. 내가 누군가를 아날로그 감성으로 사모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 감동하곤 했다. 사람들이 문희준을 좋아하는 것들은 다 어리고 못생기고 시끄러운 빠순이라고 편견갖는 것에 대한 반항이었는지, 팬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 관객들이 많은 공연일 수록 단정하고 예쁘게 하고 가서 조용히 그의 차례만 기다리다가 보란듯이 방방 뛰며 놀다 나오곤 했다. 괜히 쓰레기 줍고 착한 척 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공연을 가건 어떤 페스티벌을 가건 그 무렵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엄청난 밴드이건, 존경하는 누구이건간에 내가 어떤 연대감같은 것을 느끼고 참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냥 바라보는 것과 참여하는 것은 정말이지 다른 것이다. 또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듯이, 실제 사랑하는 사람이 부르는 무대를 보는 짜릿함은 무대의 완성도와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과거에 대한 미화라고 느낄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더욱 더 예찬적이었으며 자아도취도 잘 되었기 때문에 공연이 끝난 뒤에 조그만 전자사전에 반이나 오타를 내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 무던히 기록하려 애쓰곤 했다. 그에게 보낸 연서는 시간으로 치면 얼마나 큰 가치였을지.
순애보라는 열병은 그가 제대와 동시에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급속도로 식기 시작했다. 그가 마녀사냥을 당했던 오해의 근원을 풀고, 까방권을 가지며 분위기는 반전됐다. 문보살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여론이 달라지자 나만큼은 그를 지지하고 존경해야한다고 믿었던 순애보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이기적이었다. 어찌됐든 그때부터 지금까지 5년을 남으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오늘 네이버에서 검색순위에 문희준이 올라와서 본능적으로 눌렀는데, 트위터에 신곡 좋다 하는 몇 개의 글들을 보고 기분이 좋아 뮤직비디오를 클릭했다. 여기서 서른 여섯의 춤을 추는 문희준을 보았다. 처음에 춤을 추는 장면을 보고, 오! 문희준이 12년만에 댄스로 전향한건가? 하고 씩 웃었다. 설마하니 내가 그에게 일말의 이성적인 감정이 남았을 줄도 모르고 말이다. 뮤비를 보다가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이 됐을 때 순간 내 가슴이 쿵쾅거렸다. 과연 사람이 변해도 마음 속의 조각된 기억은 툭하고 나올 수 있는걸까? 내가 좋아했던 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문희준이 에이치오티 3집부터 현재까지 작사/곡.편곡한 곡들 중에서 유난히 댄스곡들을 높이 평가했고 좋아했다. 독립해 밴드로 전향한 이후에 좋다고 생각하는 곡들도 많이 있었지만, 팬심을 제쳐두면 세상에 좋은 곡들이 한 두 곡이겠는가. 그가 뮤지션으로서 작은 획이나마 긋기 위해서는 단순히 괜찮은 곡이어서는 안된다. 그만이 할 수 있는 곡이어야만 한다. 내가 생각할 때 문희준이 에이쵸티시절 만들었던 인아이,영혼 등등의 댄스곡들을 들으면 문희준 아니고서 다른 사람은 만들 수 없는 개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굉장히 감각적이고 세기말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 그가 하고 싶어하는 락보다 잘 하는(내 주관적인 관점) 댄스곡을 하며 춤도 췄으면 하는 바람은 늘 있어왔다. 하지만 그의 인생이니 본인의 행복을 빌며 응원했었는데 알아서 이렇게 댄스곡을 해주니 뭐 좋기도 하고.
우리 사회에서 평범히 통용되는 그 아이돌이라는 의미의 아이돌 그룹은 내겐 에이치오티라는 그룹뿐이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문희준이 있고, 독립한 그의 팬이기도 하다. 나와 같은 사람들은 많다. 우리 팬은 단단하니까. 팬질 안해도 다들 마음 속에 깊이 뭐가 있으니까. 다들 문이 춤추는 거 보고 오랜만에 웃었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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