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공부:리뷰·창작비평·비교/12_그외:인문

과잉활동. 그리고 한병철.

90' 2018. 9. 13. 22:38

오늘 한병철을 읽었다. 피로사회와 투명사회와 타자의추방을 학교 도서관에서 보았다. 타자의 추방은 빌릴 생각이다. 사랑이라는 테마와 관련해서 에로스의 종말과 함께 타자의추방도 흥미로운 관심사를 다룬 책들이기 때문이다. 타자의추방을 살 생각까진 없지만, 롤랑바르트의 사랑의단상은 원래 사려다가 말았던 책인데 우선 그것은 알라딘에서 주문했다. 아마 타자의추방은 안살듯. (롤랑바르트>한병철)



이는 피로 사회에서 내게 중요한 부분 같아서 발췌한다. 한병철은 사색적 삶을 활동과잉보다 우위에 놓으며 신비주의로 귀결하며 본인이 비판하는 신자유주의를 옹호하게끔 되어있다는 프레시안의 비판 기사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별개로 나는 내 자신이 '활동 과잉'적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이는 내 객관화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한병철이 잘 서술해주었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32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43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서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48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48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53

-피로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