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공부:리뷰·창작비평·비교/11_문학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90' 2019. 12. 6. 01:14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었다. 그냥 서재에 있어서 읽었다. 2014년에 읽다만 소설이다. 이 때는 하도 셈이 나서 주인공과 정민의 서사 뒤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명박과 함께했던 십대의 나는 너무도 또래와 다른 구좌파적인 혹은 애국적인 이십세기의 구시대적 향취를 가진 촌스러운 감성의 친구였고. 그 감성을 끝끝내 버리지 않고 여러 활동을 기웃거리고 이십대가 되었던 나는 구시대적인 강압적이고 또한 끈끈하기도 했던 문화들을 가지지 못한 동시대 또래들을 연민하거나 질투하거나 우월감을 느끼곤 했었다. 20세기의 공동체적 가치관의 촌스러운 관습들은 이미 다 사라져버린 뒤에 살고 있던 나는 그것에 대한 결핍이 있었기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주인공과 정민의 서사가 너무도 부러웠고 그게 셈이났다. 김연수든 누구든 70년대 초반생까지의 작가들은 이런 주제나 내용이 들어간 소설들을 흔하게 냈고 난 그때마다 박탈감과 결핍에서 오는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흔하기로서는 대학교 운동권 내의 로맨스. 여자는 보통 자기 주장이 강하고 섹스에도 능동적이나 사랑과 정의에는 누구보다 정열적인 주인공의 첫사랑 혹은 로맨스의 대상으로 그려지곤 했다. 난 그 여자가 나와 닮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혐오스러웠다. 그 소설을 쓴 작가들은 거진 70년대 초반생 이전의 유수의 한국문단의 파워있다는 남작가들이었고 내가 결핍이 있는 것을 그 남작가들은 동시대의 특권으로 충분히 즐기고 그것을 자신의 문제의식 가운데의 배경으로 펼치며 작가로서 내용까지 팔아먹고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아 빡치다보니 너무 서문이 길었다. 여튼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다시 읽으니 이제는 그런 결핍이 느껴지지 않았다. 15년에 나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지금은 졸업도 한 상태이고, 내가 다닌 학교는 한국에서 흔치않게 지금도 그런 향취를 이따끔씩 느낄 수 있는 시공간이었다. 그러한 학생으로서의, 또 시민사회나 운동권 언저리의 경험을 가지고 공부와 운동과 활동을 같이했던 시간들을 겪고 나니 지금은 이 글을 읽을 때 5년 전만큼의 질투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렇게 주인공과 정민의 서사를 넘어서 인드라망처럼 얽힌 주인공들의 서사를 다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 소설이 난해하다는 평이 많았지만 나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플롯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김연수가 이 글을 왜 썼는지 이해됨으로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나름 김연수를 오래 좋아해왔기 때문에 김연수가 어떤 주제에 천착하는지도 잘 알고 그가 나와 어느 부분에서 결이 통하는 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반복되는 배경들과 주제와 문제의식 - 분신 가투 김귀정 광주 운동권 80년 87년 91년 한국현대사 세계근대사 민주주의 국가폭력 불통 전쟁범죄와 같은 것들은 내 인생의 문제의식이기도 함으로 서사나 내용이 어려운 부분도 나에게는 없었다. 

김연수는 할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설명글 위주가 많은 부분에서는 약점이 될 수도 있겟다. 이 책은 김연수 개인의 생각과 이상과 신념의 기록이기도 하다. 91년의 분신정국에 김연수는 생을 걸기로 결심한듯 이 모티프가 반복된다. 김연수가 뭔 행사한다고 해서 몇년간 몇번 간적이 있었는데도 그때마다 김연수는 똑같은 얘길 했었다. 자기는 고등학교 때 그렇게 좋은 대학을 가서 자살하는 대학생들을 보고 의문이 들기 시작해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그의 소설에서는 자살하는 운동권 청년들이 많이 나온다. 원더보이에도 '분신'이라는 말은 자폐적일 정도로 반복된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도 어디에서도. 등등.

절망을 끝내 떨치지 않고 묵묵히 생으로 그 절망을 걸어내는 일. 김연수가 하는 일이다. 이것이 정직하다. 현실이야말로 암흑이다. 분신정국을 거쳐 2010년대에도 많은 분신이 있어왔다. 21세기에 분신이라니 더 큰 주목이 있을법도 하겠지만 정 반대로 지금은 이슈로 선택되지도 않는 모양이다. 누군가 그들의 죽음을 이렇게 붙잡고 있어준다면 억한 넋에게 위로가 될텐데 말이다.  

2차세계대전 시기부터 90년대 초까지 삼대에 걸친 나와 정민의 가족사들은 하나같이 국가폭력에 의해 생채기가 나있다 . 개인이 사회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구조론적 전제를 깔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대게 주체적으로 저항해왔거나 운동권이었다. 주제들은 참 고리타분하지만 난 그래도 김연수에 깊이 공감한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해온 선생의 문학을 읽는 데에서 다시 피상적인 세계에서 나를 구출해낸다. 나의 문제의식을 되찾고, 중추신경만을 자극하든 가십거리들에 절여진 뇌를 다시 깊은 곳으로 담금질한 느낌이다. 나의 고향과 언어를 찾는 것이다.

책을 보다가 너무 많은 것들이 생각나서 이리 튀고 저리 튀고 내 개인사도 다시 생각해보고 많은 생각이 든다. 책 하나 제대로 읽지 않고 커왔던 어린 시절에 의식 하나 없던 내가 왜인지 읽겠다고 빌려서 계속 가지고 있었던 책이 두 권이 기억나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읽었던 전태일 평전와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읽었던 체게바라 평전이다. 어쩌면 그것은 내 운명의 복선한 것인지도 모른다. 윤환이는 그것이 복선이라고 했다. 2003년 방학동에 있던 치과에 갔을 때 내가 읽는 책을 보고 '그런 책을 읽어?'라는 코디네이터의 말이 파편으로 생각나기도 한다. 또 생각나는 그 책 본문은 '바보회'라는 전태일이 만들었던 조직의 이름이다. 그런 거에 어릴 때부터 관심이 많은걸 보니 뇌가 그렇게 생겼나보다.   

책 한권만 읽어도 공부가 하고 싶어서 죽겠다. 책 하나 읽기 바쁜데 뭐하러 바쁘게 사는가 의문이다. 자리 잡고 커리어가 생기고 일에 지장이 없으면 추후에 대학원에 가서 공부해야지. 음악, 영화, 연출, 문학, 역사, 철학, 사회, 경제, 정치, 동북아... 너무 하고 싶은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