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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90' 2020. 12. 29. 19:43

마이클 샌델은 내가 가졌던 음흉한 이미지와는 달리 이상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능력주의가 어떻게 교만을 태동하는 지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는 겸손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일례로 트럼프를 뽑은 것이 저학력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었다고 평가절하하기 앞서 노동자의 분노를 터뜨리게 한 엘리트부터 비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일침을 가한 장면은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다. 빛을 발하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내리깔려지고 있고 무시당하고 있다는 심리적인 분노에도 초점을 잡은 생각보다 정동적인 책이다.

나는 테크노크라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엘리티시즘과 결부시켜 여러번 생각해본 적이 있다. 

현대 국가는 테크노크라시, 즉 ‘기술관료제’ 사회다.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는 그리스어 테크네(기술)와 크라토스(통치·권력)의 합성어다. 영어사전은 테크노크라시를 “①과학·기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사회를 이끄는 시스템, ②전문가들로 꾸려진 정부, 특히 기술 전문가들에 의한 사회 운영”(메리엄 웹스터 영영사전)이라고 정의한다. 대개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테크노크라트 집단의 가장 큰 힘은 공동체가 그 전문성을 인정한 데서 나온다. 일종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기대다. 권한이 큰 만큼 직업윤리도 막중하다. 개인의 전문성이 현실적 권위를 획득하는 공공성에 대한 책임이다. 그런 점에서 테크노크라시는 권위주의·형식주의·복지부동과 동의어가 된 뷰로크라시(bureaucracy, 관료주의)와 구별된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4269.html#csidx6ef18b408e1953289e71f1b231a4a24

정치는 정치 전문가가 해야한다고 믿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테크노크라시적 사람이다. 전문가가 있어야 할 영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주의로 빠지면 안된다는 것도 안다. 즉, 테크노크라시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한 쪽이 우세하면 그 쪽을 다시 눌러 수평을 맞춰야만 하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공성이다.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기대로서 테크노크라트 집단에게 공동체는 권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공공성이 실현되었는가?

기술관료적인 정치 개념은 시장에 대한 믿음과 강하게 연관된다고 한다. 시장경제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데 기본적 도구라고 여기며 시장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북이라 마땅히 페이지가 애매해서 책에서 나온 내용을 발췌하는 것은 이렇게 기울여 쓰기로 한다) -> 윤리의 영역일 수도 있는데 산업혁명 이후 나온 근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시장경제로 연관되어온듯. 

정치를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기술관료적 정치가 이루어진다. -> 소통전문가로서의 정치엘리트와, 테크노크라트 정치가는 매우 다른 개념이다. 나는 전자를 생각했는데 후자를 얘기하나보다. 그렇다면 완전히 기필코 나는 그에 대해 비판적이다. 

 

미국, 영국, 유럽에서 포퓰리즘의 발흥은 일반적으로 집권 엘리트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

오늘날의 능력주의는 세습 귀족제로 굳어져가고 있다.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적 반감이 트럼프 당선과 브렉시트 표결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믿을 이유가 있다. 능력주의의 폭정은 사회적 상승의 담론 이상의 것. 세계화에 뒤쳐진 사람들의 사기를 꺾으며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뜨린다. 또한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절하시킨다.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하이에크와 존롤스. 아예 능력이 있다고 더 보상받는다는 것을 깨버린다. 부자가 번 돈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주장과 충돌한다. 성공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공동체에 빚을 지고 있으며, 그 공동선에 일정한 기여를 해야한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샌델의 비판은 요즘 자주 재생산되는데, 샌델의 처방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사실 샌델의 요청을 받아 샌델 대신 한국어판 서문을 쓴 분조차 샌델이 제시한 처방은 서문에서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샌델의 처방을 아주 짧게 요약하면 이러하다.
첫째, 능력주의의 엔진이 되어버린 명문대 입학제는 추첨입학제로 가자. 소위 명문대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능력이 비슷비슷하고 그들의 장래를 서류 몇 장으로 평가해서 선을 긋는 것은 비현실적이니, 그냥 추첨으로 '하버드' 입학자를 결정하자.
둘째, 미국 정부가 지금처럼 일부를 위한 고등교육을 위해 막대한 예산(1620억 달러)을 쓰기보다 직업교육 및 재취업을 위한 기술교육(11억 달러)에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하자. 시민의 운명이 오로지 개인 책임인 것처럼 다루는 정책을 개혁하자.
셋째, 모든 노동자들이 스스로 사회에 기여하는 바에 대한 정당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공동선에 대한 담론이 활발한 사회를 만들자. 학교 선생님보다 약탈적 금융업자들을 더 선망하는 왜곡된 명망의 위계질서를 (조세제도 개혁 등을 통해) 뒤엎고 일의 존엄성을 되살리자.
둘째와 셋째 주장은 그럴법하지만, 첫째 주장을 접했을 때는 솔직히 좀 놀랐다. 이분이 이리 과격한(?) 면이 있었나 싶고, 이분이 하버드 총장이 된다면 재미있겠다 싶고, 우리 학교도 10명 중 1-2명 정도로 한번 실험을? 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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