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공부:리뷰·창작비평·비교/11_문학

김연수,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

90' 2016. 5. 15. 23:28

학기 초 첫 시간이면 으레 클래스에서 제일 장난꾸러기처럼 보이는 남학생을 불러세워서는 ‘네 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얘기해봐라’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발성을 냈습니다’처럼 재치 있게 대답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대개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머뭇거렸지요. 그러면 나는 그 학생의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긴 뒤에 눈을 감으라고 말했어요. 나는 인질범이고 너와 나 사이에는 외나무다리 하나뿐이다. 우리는 지금 100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 서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데 난간 같은 건 없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너는 죽는다. 그런데 내가 너에게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오지 않으면 잡고 있는 인질을 죽이겠다고 해서 너는 망설이는 참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굴 인질로 잡고 있어야 너는 목숨을 무릅쓰고 그 다리를 건너오겠는가?

(…)
내가 들은 대답 중 가장 그럴듯한 건 울음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학생의 발은 그녀에게 목숨을 걸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죠.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