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공부:리뷰·창작비평·비교/11_문학

흰 바람벽이 있어 (노래 제목으로도 좋을 듯)

90' 2014. 10. 22. 14:02

백석. 언젯적 윤동주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예전에는 비등비등하게 좋았는데 지금은 백석이 더 좋다.


바로, 순수함, 솔직함.

꾸미려고 하지 않아서 순수한 감동이 있었다. 
의식의 흐름을 좀만 가지를 쳐내는게 
몇 번의 퇴고와 다듬어지고 꾸며진 글보다 백배천배 낫다.

그걸 깨달았다.
내 가사에도 멋을 내지 않도롤.
내 말은 멋을 내되 보는 사람이 멋 낸 가사처럼 느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이,
순수하고, 솔직하고, 무슨 말인지 시상전개가 되어지는 그런 가사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1941)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때글다: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다
*개포: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울력: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하거나 이루는 일


백석은 세 번의 통영행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박경련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1936년 4월 서울을 떠나 함흥의 영생보고 교사로 부임하였다. 1936년말, 겨울방학을 맞이하자 다시 허준을 앞세워 통영으로 가서 정식으로 청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넉 달 후인 1937년 4월 박경련은 백석의 친구인 신현중과 결혼하였다. 거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불과한 백석의 관심표명은 박경련이 결혼함으로써 끝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짝사랑일수록 아쉬움이 많이 남는 법. 더군다나 그 여인이 자신이 잘 아는 친구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쉬움을 더욱 짙게 했을 것이다. 그 후의 백석의 시에 박경련의 이미지가 몇 번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박태일은 이 점에 대해 1937년, 10월에 발표한 <바다>에는 마음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1938년 4월에 발표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는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는 모습이 나타나며, 1938년 10월에 발표된 <남향>에 이르면 하나의 그리운 풍경으로 객관화되고 있고, 1941년 4월에 발표한 <흰 바람벽이 있어>에는 모든 것을 가라앉히고 멀찍이 떼어놓고 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음이 드러난다고 설명하였다.   - 이숭원, <백석의 삶과 여성 관련 시편>, 《한국근대작가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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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시스 잠 (Francis Jammes, 1868.12.2 ~ 1938.11.1)
상징파의 후기를 장식한 신고전파 프랑스 시인. 상징주의 말기의 퇴폐와 회삽(晦澁)한 상징파 속에서 이에 맞선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

# 도연명 (陶淵明, 365 ~ 427)
중국 동진(東晋) ·송 대(宋代)의 시인.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출처]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1941) (국어하는 포유류) |작성자 무지개주의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