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밑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 프롤로그 중
산문시를 꿈꾼 흔적이 없는 산문은 시시하다. - 11
진실은, 그것이 참으로 진실인 한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은 함부로 진실을 진술하기보다는 진실이 거주하는 고도의 언어적 구조물을 구축해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 재현해야 할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언어는 그 진실을 투명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느슨한 믿음은 미학적으로 보수적이다. 반대로 언어가 사태를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진실을 투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태도는 미학적으로 진보적이다.
시가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의심할 때 나타나는 어떤 진정성의 표지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분한 구도 이전에 먼저 언어에 대한 태도가 있고, 그 태도가 미학적 진보와 보수를 규정한다. - 17
그러나 언어에 대한 의심은 진실에 대한 경외와 나란히 가는 것이어서, 언어에 대한 태만은 진실에 대한 오만을 낳는다. - 18
반성하는 시인보다 엄살떠는 시인이 더 애틋하다. 치욕을 잊어버린 시대에 영혼이 뚱뚱해진 시인이 슬픔에 익숙해진 채로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속물의 시대에 차마 주먹질은 못하고 멱살만 잡고 떤다. 이 슬픈 신경질이 감미로울 정도로 생생하다.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다. 이 문제적 자아의 엄살에는 계보가 있다. 성자는 못 되겠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
나, 형의 기분 알 거 같아요, 저도 이 시대가 지긋지긋해요. 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염성이 높지만 흉내 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127
고뇌는 공동체의 배수진이다. 그 진지가 무너지면 우리는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 275
# 나.
고뇌란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에 대해 고뇌하는 것을, 그 불편한 지점들을 감내해야 한다. 당신과 이야기할 때 주저할 줄을 배워야 한다.
언어가 아닌 것에서 당신의 언어를 읽어야 한다. 언어가 아닌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 당신이 말하지 않는 동안, 당신이 내뱉는 숨소리에서 당신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다 선언하고, 당신과 함께 있지 않을 때에도 당신의 존재를 느끼며,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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