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는 길, 지하철에서 읽었다. 아마 2년 전에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1. 문학을 전공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 웃기다. 사실 국문이면 문법이나 고전 위주, 영문이면 영어 위주. 그나마 독문이나 노문이 문학배우긴 나은 정도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냥 감정이 쑥 오니까 내심 아쉬워지는 것이다. 문학을 강요받는 무언가가 내 삶에 존재했으면 싶어서 말이다. 내가 찾지 않아도 찾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음 좋겠어서 말이다.
2. 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
: 왜 아름다울까 싶으면, 코로 숨만 쉬어도 하얀 입김이 얼듯한 설산이라는 이미지도-나는 러브레터도 그렇고, 내가 죽을 때도 그렇고, 설산이라는 이미지를 좋아한다-, 80년대 화염병이 오가는 학생운동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던 연애라는 묘한 공기도, 얼굴을 알 수 없는 슬픔을 가진 그 남자애도, 여자애도 그렇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미 끝난 이야기, 누가 죽은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그 덮여진 눈을 파내어 펄펄 흐르는 감정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는 듯한 것이라는 게. 그걸 담담하게 쓴다는게.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면서도 눈물 하나 느끼지 못하는 그 외로운 가슴을 가진 사람의 세계를 껴안는 기분이란.
나도 그런걸 쓸 수 있을까. 이렇게 소중하고 아름답고, 세계가 멸망해도 존재해야하는 어떤 감정들에 대하여 나도 쓸 수 있을까 생각해보게 한다. 게다가 언어와 형식 자체에 보수적이지 않고 싶다는 욕심까지 더 해서 말이다. 내 살아온 과정을 되돌이켜본다. 이미 사장된 그 애를 꺼내어서 그 때 그 애 감정을 돌이켜보는 시도까지 해본다. 내친김에 이미 죽은 그 애를 지나 또 다른 슬픔을 가진 새로운 사람까지, 출연시켜본다.
과연 그건 아름다운 소설이 될 수 있을까? 흔해빠진 삼류 연애 소설만도 못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완성도를 떠나서 그저 내 행복을 위해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소설이라고 도전해본 글은 내가 쓴 기록문보다야 아름답지 않겠는가?
3. 내가 충분히 혼자있는 시간이 필요하단 것
: 내가 내향적인 것인가, 라는 생각도 해본다.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당연히. 어쨌건 내가 나를 돌이켜보고, 내가 이런 문장들을 시향할 시간이 없다면 나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냥 충분한 시간, 혼자있는 시간이 필요하긴 하다는 것을 되새김한다. 또 나는 비교적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감성적인 쪽이라고 해서 휘몰아치는 감성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머리가 빨리 돌아가면 내가 감당할 에너지 소모가 두려워서 머리로 정리부터 해서 최대한으로 피하려는 것은 아닐지.
4.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란 것
: 어줍잖게 멋쩍어서 털털한 척, 쿨한 척, 센 척 같은 것들, 다 하지 않아도 된다고 용기를 내게 한다. 아름다움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토닥여준다. 내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나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고 차분히 가라앉아도 된다고. 그거 허세로운 것 아니라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닮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동경까지 할 이유는 없지만, 굳이 아름다움이 행복의 약속이란 사실을 밀어내려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5. 다시 사랑할 용기.
: 어느 시인이 말했다. 슬픔이 있는 사람만을 사랑한다고, 였나. 나는 슬픔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단 한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분명 슬픔이 무엇인지는 아는 사람일 것이다. 슬픔을 겪어보아서 묵직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사람. 만약 슬픔을 겪어보지 않았는데 그런 것이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엄청난 내면의 포용력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사랑은 곧 무너지는 것이라고 했다. 힘껏 다해서 사랑하고 무너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한다. 마치 슬픔이 느껴지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런 힘과 비슷한 힘도 느껴진다. 순애보로 뭉친 사람에게서는 꾸며내지 않았을 때, 호사가들이 어마어마하게 단장을 해 꾸민 것보다 훨씬 감동이 느껴진다. 시인 백석이 대표적이다.
나도 그렇게 해도 되겠지. 내가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할만한, 특별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어서 그 사람의 똥까지 사랑할 노력을 하지 않는 것. 이제 하지 않으련다. ~하고 싶다 같은 소망이 아니다. 전언이다. 나는 똥까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될련다. 그래도 되겠다. 사랑은 곧 무너지는 것. 그거,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일인 것 같다고 소설 읽으면서 느꼈다.
사랑은 능동이다. 사랑은 능력이다. 사랑은 내가 선언하는 것이다. 첫 감정은 불가항력일 지 몰라도, 그 후 사랑으로 진입하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한 선택이다. 그 감정에 적당히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 흐르기만 할 것인가, 혹은 무너짐을 각오하고 뛰어들 것인가. 사랑받는 것은 자랑할만 하지만, 사랑받기만 할 줄 아는 건 정말이지 애석한 일이다.
6. 정신적인 것
: 생활 세계에 살고 현실적이 된다고 해서 정신적인 사람이 정신성을 포기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나이를 들면서 점점 내 감성이 무뎌진다고 해도, 내 감정을 생활에 묻어두었대도, 혹은 모두 분출해버려서 미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죽기 전 어느 순간에는 또 느낄 것이다. 그 순간 후회하지 않고 싶다. 그 순간 내 옆사람과 내가 정신적인 것을 공유할 수 없다면 아마도 후회할 것 같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내가 굳건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고. 다만, 정신성에 관해서만큼은 타협은 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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