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샤쿠 <깊은 강>에서처럼 천주교적이면서도 범신론적인 영적 기운이 느껴진다.
인물들은 나무가 되려 한다. 사람이 나무가 되는 변신의 과정은, 모두 '사랑의 좌절을 보상받기 위한 것'이다. 나무가 되는 방법이든, 짝사랑 상대에게서 오직 나만을 위한 노래를 듣는 것이든간에 모두 좌절한 사랑의 댓가로 보상받기 위함이다.
나아가 이렇게 느낀다. 사람은 좌절한 뒤 어떤 방법으로든 보상받고 싶어한다. 상처받은 사람도 전염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덮는 유일한 것은 지속적인 사랑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유동적인 공포>의 죽음의 공포 섹션, 그리고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을 읽은 뒤, <깊은 강>과 비슷한 이 <식물들의 사생활>이라는 책을 읽으니 왜 문학을 통해 '이야기'로서 접근해야 하는지 다시금 느낀다.
구체화된 이야기에서 구체적인 사람을 보고, 나는 그 사람들의 사랑을 느끼며 아파한다.
이 세상은 전부 사랑으로 가득찼다. 삶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이 가득차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런 세계에서 고작 해봐야 몇 십 년 뒤에 영원히 추방당한다. 하지만 이 필연적 소멸을 직감하는 사람만이 더 치열하게 살 수 있다. 남은 날은 정해져 있다. 언젠가는 오고야 말 마지막 밤.
모두들 거대한 마취제를 취하고 산다. 다들 종교에도 어떤 이성적 칼날을 들이대며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지 않는다. 회사에도 남들도 그렇다며 받아들이고 그러려니 다닌다. 마치 몇 백년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낸다.
거대한 마취이다. 그들을 욕할 수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런 것은 전염이 빠르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마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이 고단할수록 죽는 것이 무섭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안타깝지만 사회문제를 내가 바꿀 수 없다. 나는 내 삶이 있고, 설령 희생해도 그 벽은 수 세대간의 연대로서만 이루어질 문제다.
문득 내일 볼 사람이 오늘 내게 무엇인가를 가져다준다고 해서 나는 바보, 우리 내일 보잖아? 라고 말했다. '내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사치스런 행복인가.'
<식물들의 사생활>에서 엄마가 말하듯, 모든 사람은 사랑하는 방식이 다 다를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특별하다. 누구에게나 사랑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연이 필연을 만들어버리는 선언된 사랑은 도처에 있다.
사랑을 포함한 모든 것은 우연으로부터 시작된다. 다만 나의 (능동이든 수동이든) 선택만이 그것을 운명으로 바꾸는 것이다. 사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결단과 선택이 삶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만일 다른 삶을 살았으면, 다른 노래를 지었을 것이지만, 난 지금 이 삶을 살고 있기에 이런 노래를 짓는다. 다른 가능성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방법론이 다를 뿐 진실된 삶이라는 목표에만 다다르면 될 것이다.
조건으로 결혼상대를 찾는 파트너 개념의 결혼은 현실 세계에서는 현명하다. 삼십이 넘은 여자가 사랑타령을 하면 철이 덜 들었다고 하는 광경이 현실이다. 실제로 사랑하기로 '선언'하기만 하면 그 이후로는 사랑으로 시작한 사랑이나, 조건으로 시작한 사랑이나 별 다름 없을 수 있다. 실제로 정으로 사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다른 이의 삶이 아닌, 내 삶을 욕망하는 내가 조건으로 사랑을 시작한다면, 그것만큼 바보같은 짓은 없다. 내 무의식으로 나는 알 것이다. 내가 유일한 일회적 삶을 내 스스로 포기했다는 것을.
원죄로 말미암아 치열히 사랑할 자신이 없을 것이다. 물론 성찰없이 사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되기에 그들은 사랑보다 조건을 택하는 것이 그들 말대로 현명한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조건없는 우연적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사랑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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