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공부:리뷰·창작비평·비교/25_페미니즘

N번방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다.

90' 2020. 3. 24. 16:36

내게 N번방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다. 작년 초 막학기에 졸업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려는데 굳이 가까운 도서관을 가지 않고, 이 기회에라도 불법촬영물 근절에 대한 연대를 하고 싶어 한사성(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에 따로 요청을 하여 그것으로 봉사하게 됐다. 물론 충격적인 사건 접수가 하루에도 연이어졌다. 하지만 분노하고 충격받기엔 지우기 위해 일해야할 것들이 산더미였고 눈물이 흘러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다행히 얼마나 음지에서 성범죄가 만연한지 알고 찾고 공부했기에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잦은 주기로 해외 도메인을 타서 움직이는 수만개일지 수십만개일지 모를 사이트들에 매일같이 올라오는 불법촬영물들과 성착취영상 등의 목록 바로 옆의 동시접속자수는 평일 오전에 이미 수만명인 경우가 많았다. 일상 생활에서는 절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듯이 살아가는 가면쓴 남자들이 내 주변에도 많을 것이란 것을 인지해야만 나이브해지지 않는다고 어떻게든 나 자신을 이해시키며, 분노하지 않고, 직시하자고 생각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다. '나는 야동이 아니다', '나는 이것으로 고통스럽고 죽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들어야 더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얘 이거때문에 자살했음', '신고 들어왔네요' 등등의 제목으로 그런 성범죄 영상들이 올라오고 활발히 유통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여자를 사지로 몰고가는 것이어야 더 흥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직접 고통받고 있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알아듣기는 커녕 그 행동이 강화된다.

봉사활동을 하다 한사성 측에서 당시 뉴딜일자리를 통해 이곳에서 일하는 것은 어떨지 제안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미 하는 일도 있어서 상근활동은 불가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불러주시면 중간중간 봉사라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따로 그 이후에 연락이 오지는 않았고 나도 잊고 살고 있었지만, 내가 중간중간 봉사라도 나갔다면 N번방 사건을 내가 직접 다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절망적인 것은 N번방이 충격적일지언정 그 곳의 피해자들은 모두 고통을 받고 있고 잔인한 사건은 그뿐만이 아니다. 또한 한 사건에 분노할 시간도 아까울 것이고, 그저 욕을 하든 눈물을 흘리든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모니터링하고 지우는 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세계에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N번방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충격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국가적 이슈가 된 지금에서야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음지에 만연했던 사건들이, 보도가 되어도 외면당했던 사건들이, 모두에게 충격이 되었다는 충격. 사실 이런 불법 영상들의 잔인함의 정도가 충격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지우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지우기를 요청해도 비웃듯 해외 아이피로 우회해 매일같이 쏟아져나오는 상황이 용인되는 이 한국 사회 자체가 우리가 상시적으로 충격을 받고 정지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난 이것이 균열이 되는 것 같아 눈물이 나오고 몸이 떨린다. 누군가만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픔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공인받은 것이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부터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절절한 자기고백들과 성찰들, 낙태죄 폐지 등등 여러 이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을 때에 이러한 친구들을 옆에 두고도 나는 무감각한 편이었다. 정확히는 그 이전부터 나름대로 페미니즘에 관련해 생각하고 공부를 해봤고 그렇기에 그런 현상이 사회에 균열을 낼 수 있음에 기뻐했지만 과도기에서 나오는 문제점들 때문에 상당부분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세상이 이렇게 더러운 거 모두들 알고 있었잖아.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지지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여럿 있었고 나이브해보인 지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난 2008년, 십대시절 우연히 가게 된 서울여성회에서의 언니들, 밤새 날 앉혀두고 얘기해주던 이름도 까먹은 언니, 그리고 동네 도서관에서 읽었던 페미니즘 서적들 이후로 2020년 처음 각성을 하게 되었다. 충격과 내 몸이 떨리는 기억들은 12년만이다. 한국사회가 N번방 사건을 통해서, 음지에서는 성착취를 해도 되고, 음담패설을 해도 되고,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가도 된다는 인식을 뿌리뽑는데 내 방식대로 끝까지 물고 늘어질 생각이다.